말투가 세류에 영합하는 부류가 어디 정치인뿐이겠는가? 신문 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교육계에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고 있는 것이 언어 파괴 현상이다. 은어와 속어는 말할 것도 없고 약어와 비어(卑語)는 듣는 이를 혼란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21세기 정보사외의 특징 중 하나가 속도(speed)이다. 인터넷과 휴대폰의 발달이 이 속도전을 더 부추기고 있다.
언어 파괴 현상도 이런 문화의 산물이다. 최대한 간단하게 줄여서 의사를 전달하다 보니 문법과 어휘는 안중에 둘 여지가 없다. 형식을 벗어난 언어 구사는 엉뚱한 곳으로 치닫기 쉽다. 아이들이 쓰는 비속어를 들을 때면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있다. 문제는 비속어를 쓰는 층이 확산되고 있으며 비속어가 욕설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모르고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신문 기사를 보다가 눈에 거슬리는 대목을 발견했다. 정치인들이 쓴 말 중 약어 때문이었다. 정치인들은 이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지도자층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언어 사용도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많은 정치인들이 세류에 영합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 정형(定形)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언어 파괴 현상인 은어 속어 약어 비어를 막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 신문 기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당정 협의회를 개최했다는 기사 중에 포함된 내용이다. 한 여당 국회의원의 질문에 국토부 장관이 답하는 대목이었다.
한나라당 김광림 의원이 한 주장성 질문이다.
"울릉도 경비행장 사업이 예타(예비 타당성)에 걸려 집행이 안 되고 있는데, 일반 사업과 달리 대일관계 등을 감안해 다시 예타를 실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종환 국토부 장관이 이렇게 대답했다.
"예타를 정책적으로 다시 추진하는 문제를 적극 검토하겠다."
예비 타당성을 '예타'로 줄여 사용하고 있다.
언어는 속도성 못지않게 정확성도 중요하다. 가벼운 대화 자리가 아니라 회의석상에서는 더 그렇다. 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이 단어 하나의 이해 차이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우리말은 한자어에서 온 것이 많다. 한자어는 주지하다시피 뜻글자이다. 여기에서 줄여 쓴 '예타'만 해도 여러 개의 단어를 연상할 수 있다. '예타(豫打)'는 미리 치는 것이고, '예타(禮墮)'는 예절의 타락을 말하고, '예타(銳咤)'는 예리한 꾸짖음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의 단어가 깊이 들어가면 이렇게 많은 뜻을 나타낼 수 있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약어를 피해야 할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대학 교수와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요즘 아이들의 말을 화두에 올렸던 적이 있다. 비속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이들이 잘 쓰는 단어를 하나 예로 들었다. '존나'가 그것인데, 어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이들이 이런 유의 은어 속어를 다반사로 쓰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우려를 표명했다. 그러나 그 교수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목사님, 그냥 세상 풍조를 따르세요. 그것이 편해요. 지금 아이들이 쓰는 은어 비속어 약어 모르면 살아가기 힘듭니다."
나보다 젊은 대학 교수여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지지 않고 그에게 주문하듯 말했다.
"우리말을 순화시키는 데에는 언론인, 정치인, 목회자 등 다수를 상대하는 사람들이 솔선수범해야 하겠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요. 대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전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떡합니까?"
말은 습관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보면 언어는 기호(記號)이고 관념의 산물인 것이 많기 때문에 욕이 욕이 아니게 될 때도 올 수 있다. 또 은어 속어 약어도 세월이 흘러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면 정당한 자기 가치를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은 우리가 잘 사용할 때 그 값이 더 빛을 발하고 사회적 기능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당장 지금 '나'부터 정화된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할 일이다. 내가 확산되어 우리가 될 때까지 굽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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