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내고향 강진만(康津灣)
김 수 복(金洙福)한국노동연구소 이사장
군대를 제대한 사람은 모두 고생하지 않고, 편하게 잘 복무했다고 하며, 낚시꾼들은 저마다 월척(越尺)을 건졌다고 주장하듯 자기 고향(故鄕)을 사랑하고 자랑하지 않는 경우를 필자는 본 적이 없다. 고향은 객지(客地)에 나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큼 풍성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며, 정겹게만 느껴지는 ‘그리움의 바다’이다.
필자는 군동면 호계리 갈전마을에서 아버지 김주암 씨와 어머니 주이례 여사 사이에 9남매(6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군동초등학교 4학년 때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겪었고, 강진중학교(4회)와 강진농업고등학교(16회)를 졸업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흙과 함께 자랐으며,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세대인 필자로서는 오히려 그때 그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마음 깊숙한 곳 어딘가에 풍요의 옹달샘이 흘러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강진농업고등학교를 재학 중에는 가끔 우두봉의 끝자락인 북산에 오르곤 했다. 북산에는 비둘기 바위가 있었는데, 펑퍼짐하고 비스듬하여 편하게 누워서 쉴 수 있는데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도 봄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떠오르는 달빛 아래서 바라보는 강진만(康津灣)의 야경(夜景)은 서기산 자락을 붉게 물들인 석양의 저녁 노을과 함께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폭의 수채화로 필자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어느덧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졸업 후 40여년이 지난 1999년 12월 초 강진농고 총동문회가 개최되던 날 모교를 방문하고 눈부신 발전에 놀랐다. 벅찬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나의 재학시절은 1950년대 중반이었는데, 6·25 전쟁으로 학교건물은 폐허로 변해 임시로 가설된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바닥이 흙바닥이어서 흙먼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번을 정해 매시간 물을 뿌리며 공부를 했었고, 겨울엔 그렇게 발이 시려도 참고 견뎌내야 했다.
그날 모교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감격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모교 재학시절 훌륭한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벗과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면서 나눔과 베푸는 것의 소중함을 알았으며, 농장 실습을 통해 공동체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연의 섭리가 참으로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강진농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그 당시 1년에 20명의 합격자밖에 배출되지 않았던 제3회 행정고등고시(1965년)에 합격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합격자 발표때 출신학교를 함께 발표했는데 나의 모교인 강진농고가 모든 신문에 보도됐을 때 무한한 감동과 자부심을 느꼈다.
모교는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였고, 내 가슴속에 살아있는 스승이었다. 이제는 비록 전남생명과학고등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었지만, 천년 예술의 향기가 살아 숨쉬는 고려청자의 본고장 내 고향 강진, 마량항(馬良港)의 깊고 푸른 바다, 만덕호의 갈대밭 춤사위, 흘러드는 탐진강(耽津江)의 갯벌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예향(藝鄕)강진고을에 우뚝 솟아 평생토록 내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다.
비록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온 지 오래되었어도 변한 것은 세월뿐이리라. 함께 뛰어놀던 교정, 친구들과의 끈끈한 우정과 모교사랑, 고향사랑은 변함없이 한결 같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도농간(都農間)의 노동력 이동의 경제적 효과』란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내가 강진에서 태어났고 강진농고를 졸업했다는 인연(因緣)과 내 고향 강진의 농업문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학문적 성과였다.
몇 년전 처음 듣기엔 생소한 ‘워낭소리’라는 영화가 관객 200만명을 돌파했다는 언론보도를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 ‘워낭’이 고향에서 내가 자라고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전라도 사투리로 ‘핑경’ 또는 ‘핑갱’이라고 했다.
강진의 우두봉(牛頭峰) 좌우로 금곡사(金谷寺)와 고성사(高聲寺)가 있어 새벽 예불(禮佛) 종소리가 마치 소의 좌우 ‘워낭’에 비유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고성사에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혼자 생각해보곤 했다.
유난히 소와 관련된 이름이 많은 강진, 이제 능력 있고 훌륭하신 스타단체장 황주홍(黃柱洪) 군수님의 과학적 군정(郡政)으로 우리 고향이 놀랍게 발전하고 있다.
강진만의 청정 바다와 무공해 농수특산물의 특장을 살리면서 강진만의 독특한 고부가가치 관광상품의 개발을 기대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강진읍 축구장과 도암면 학장리의 베이스볼파크의 성공적 운영과 성전산업단지 조성은 이제 고향 발전의 서막에 불과하다.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음미하면서, 우리 고향 강진! 남해 푸른 바다를 끌어안고서 ‘동순천 서강진’의 옛 명성을 되찾게 되는 날이 곧 우리 앞에 전개되기를 바라고 또 간절히 기원한다.
■ 약 력
· 군동면 호계리 갈전마을 출생
· 강진중학교 졸업(4회)
· 강진농업고등학교 졸업(14회)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 동국대 경영대학원 졸업(경제학 박사)
· 행정고등고시 합격(3회)
· 노동부 총무과장
· 중앙노동위원회 사무국장
· 한국사회법학회 회장
· 대통령 직속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자문위원
· 노동부 규제심사위원회 공동위원장
· 숭실대학교 노사관계대학원 겸임교수
· 재경강진중 농고 총동문회장
· 재경강진군향우회장(16대)
· 현재 사단법인 한국노동연구소 이사장
· 2010년 ‘자랑스런 강진인상’ 수상
· 저서
『노동법』(중앙경제사, 2004년)
『근로기준법』(중앙경제사, 2007년)
『비정규직노동법』(중앙경제사, 2008년)
『채용에서 퇴직까지의 노사문제』(중앙경제사, 2006년)
등 30여권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