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누아르, 마비된 손목에 붓을 묶어 그림 그려 | ||||||||||||||||||||||||||||||||||||
[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31. 르누아르의 <우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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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여성 누드 여성 누드의 원조는 유명한 <빌렌도르프 비너스>이다. 이 작은 조각은 구석기 시대 작품으로 기원전 2만 1,000년경에 만들어졌다. 또 구석기 시대 누드의 여인상으로는 상아에 새겨진 <레스푸그 비너스>가 있으며, 1962년 앙카라 아나톨리아에서 발견된 후기 신석기 시대의 <여인좌상>, 기원전 4000~3000년에 이집트 마마리아에서 출토된 <작은 여인상>이 있다. 여성 누드가 본격적인 작품으로 다루어지는 시기는 헬레니즘 시대이다. 이 시기는 신화 속의 여신들이 누드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여신이 바로 미의 신 비너스이다. BC.370년경에 만들어진 <크니디안 비너스>는 프락시텔레스(Praxiteles)가 만든 누드의 비너스로 크니도스(Knidos) 시민들이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아름다움, 다정한 시선, 찬란한 광휘와 환희의 표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 비너스 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멜로스(Molos)의 비너스>가 있다. 이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라는 신화의 주인공을 가장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명료하면서도 단순한 표현,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누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완벽한 비례미를 보여주고 있어, 서양의 고전적인 미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폼페이 벽화에서 의례를 행하는 누드의 인물들이 등장하다가 중세 기독교 미술 시기에 와서, 누드는 기독교의 교리에 가려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르네상스기에 다시 누드가 부활하게 된다. 르네상스기에 그려진 대표적인 누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이 그림은 미의 신 비너스가 바람의 신 부부가 던져주는 장미꽃 세례를 받으며 조가비를 타고 해안으로 밀려오는 작품이다.
르누아르는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관능적이고 풍만한 여인을 즐겨 그렸다. 르누아르의 누드화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비만증에 걸린 여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누드는 대자연의 어머니로서의 누드를 상징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A . Renoir, 1841~1919)는 1841년 2월 리모주에서 재단사인 아버지와 재봉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일찍부터 노래와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는 르누아르가 리모주의 전통 예술인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되었으면 했다. 1854년 레비에 있는 도자기 공방의 도안사로 들어가 꽃 장식이나 복잡한 도안을 잘 그렸다. 그러나 4년 후 산업사회의 변화로 새로운 도자기 기술에 밀려 그 공방이 파산하자, 다시 18세기 프랑스 전통에 따라 제작된 부채와 창문에 치는 발에 그림을 그렸다. 1860년 르누아르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루브르 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을 연구했는데, 특히 루벤스, 프라고나르, 부세의 작품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르누아르는 루벤스가 살갗을 부드럽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다. 1864년부터 1870년까지 르누아르는 살롱전에 출품하면서 몇 번 낙선했다. 1865년 시슬레 아버지의 초상화를 포함해서 2점이 살롱전에 입선했다. 이 무렵 르누아르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여서 시슬레의 집에 살다가 시슬레가 결혼하자 바질르의 화실로 이사를 했다. 1870년 보불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1883년까지 르누아르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르네상스 거장들처럼 무엇보다도 먼저 훌륭한 장인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기량을 완벽히 갖춘 다음에, 다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상(理想)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상이 결핍하면 가장 솜씨 있는 손도 끝내는 사상의 하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르누아르 그림이 점차 인상주의로 진행됨에 따라 밝고 빛나고 풍부한 색채의 그림을 그리게 됐다. 르누아르는 인물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인상주의를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등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반열에까지 끌어올렸다. 르누아르는 풍경, 정물, 초상화, 누드 등 그림의 시야와 영감의 폭을 넓혀감으로써 프랑스만이 아니라 전 세계 회화의 위대한 거장들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883년 4월 뒤랑 뤼엘은 마들렌느 대로에서 르누아르의 특별전시회를 열어준다. 그때부터 르누아르는 인상주의 스타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르느아르는 인상주의가 무형태(無形態) 속에 빠져버릴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여 선(線)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와 단절하게 됐다. 그 후부터 다채로운 색깔도 단조로운 색깔로 바뀌었고, 색깔도 서로 부딪치게 됐다. 기법은 메마르고 도자기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졌다. 1887년 살롱에 전시된 <목욕하는 여인들>은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르느아르는 1890년경 다시 새로운 탐구를 그만두고 인상주의로 되돌아가지만 두 가지 경향을 종합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르누아르는 1894년 이후 20년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내의 사촌인 가브리엘 르나르를 즐겨 그렸다.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여성, 노동자 여성, 무용수, 여자 재봉사 등을 그렸는데 하나같이 은은하고 우아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1903년 르누아르는 류마티스가 악화되자 남프랑스 까뉴에 은거하면서 그곳에서 마비된 손목에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다. 1903년에서 1919년 동안 이 시기에 르누아르의 스타일은 활짝 피어나서 일종의 범신론으로 발전해 갔다. 1919년 르누아르는 그의 별장 '레 꼴레뜨'에서 일생을 마쳤다(모리스 세륄라즈, 1991).
<우산>은 파리의 어느 봄날 야외로 나들이 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은회색과 청회색의 색상이 매우 아름다운 작품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나서 다시 보슬비가 내리는데도 자태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여인들의 발랄함이 돋보인다. <우산>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산업사회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 상단에는 청회색의 우산으로 어둡게 가림으로써 우산 속의 인물들의 표정과 색상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앞 좌측의 한 여인은 점원인데 윤곽선이 분명하면서도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르누아르는 평생 평범한 일상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나는 폼 잡지 않고 영원성을 간직한 그림이 좋다.....매일의 일상 속에서도 거리 한 모퉁이에도 일상성이 존재한다. 냄비를 닦다 잠깐 멈춰선 하녀의 모습도 올림푸스산의 주노 여신 못지않게 위대하다"(캐롤 스트릭랜드, 2000). 이 작품은 앵그르 시기(1883~1890)의 작품인데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다시 거장들의 세계로 되돌아가고자 한 때의 그림이다. 앵그르 시기는 윤곽선을 강조하고 색채의 영역이 더 넓어졌으며 인물들은 부조 같지만 얼굴은 단조롭다. 그리고 선을 통해 그림 속으로 길이 나있는 듯한 거리감의 효과를 준다. 이 시기는 양식은 건조하지만 삶의 기쁨이 한층 더 배어난다. 그가 관심을 가진 일상의 아름다움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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