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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과 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과 발
이여영

일에 싫증을 느끼고 사람에 실망할 때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마다 그런 상황을 이겨내는 비법들이 있을 겁니다.
술로 흥청망청 견디려고도 해봤는데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더군요.
요즘은 제게 감동을 준 사람이나 장면들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내가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면 삶에 대한 재미와 열정이 배가되니까
숙취로 끝나는 방법에 비해 문제를 푸는 데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어려울 때 떠올리는 사람과 장면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쩍 자주 떠오르는 이가 바로 스포츠 클라이머 김자인(23)입니다.
아마 언론 매체에 그이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그를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제가 초보 기자 시절이었을 때입니다.
당시 데스크 지시로 별 감흥 없이 서울 시청 앞에서 열린 인공암벽타기(볼더링) 대회를 취재했습니다. 그 때 유난히 키가 작고(152cm) 눈빛이 초롱초롱하던 그를 봤습니다.
그에게 볼더링에 대해 배우게 됐죠.
낯선 사람과는 말 붙이기가 쉽지 않은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는데도,
그는 친절하고 소탈하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주더군요.

그가 스포츠 클라이밍 분야에서 세계적인 선수라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 지 2년 후부터 매년 스포츠 클라이밍 월드컵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더군요.
몸집이 작아 아시아인에게 불리한 종목인데도, 그가 기적 같은 우승들을 일궈왔다는 보도도 한참 후에야 접했죠. 제가 그를 만나 취재하던 그 날도 그는 우승을 했는데요.
우승자답지 않은 해맑은 태도로 저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저 역시 갓 어설픈 기자가 된 처지여서, 기자답지 않은 태도로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죽이 맞아 얘기를 하다 문득 떠올랐습니다.
인공암벽이나 실제 암벽을 타고 오르려면 손과 발이 고생깨나 하겠구나 하고.
그래서 불쑥 손과 발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손과 발에 자신이 없는 분이라면 그런 요청을 결례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전문 클라이머들로서는 당연히 그랬을 거고요.
그런데 그가 선선히 손과 발을 보여줬습니다.
초보 기자가 그것들을 디지털카메라에 담는 것도 너그러이 봐주더군요.
그래서 제 카메라에 담은 것이 보시는 사진들입니다.

세속적 의미에서 그 손과 발은 참 못생겼습니다.
원래 그렇게 타고 난 게 아니라 자신이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일,
스포츠 클라이밍 탓에 기형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손은 워낙 힘을 주느라 마디마디 튀어나왔습니다. 게다가 암벽에 짓이겨져 지문마저 거의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사실을 두고 농담을 건네자, 그가 진지하게 답하더군요.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공항에서 가장 곤혹스럽다고.
지문이라도 채취하려 들면 10개 손가락을 다 들이대도 찍히질 않는다고.
발은 또 어떤가요? 굳은살이 박히다 못해 숫제 발가락들이 다 오그라들어버렸습니다.
발가락을 정상적으로 펴기가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긴 그럴 법도 했습니다.
등산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클라이밍을 시작했더군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는 점은 이름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등산가들의 생명줄인 ‘자일'(seil)의 자와 ?등산가들의 성지인 ‘인수봉’의 인자를 합쳐 ‘자인’이었습니다. 처음 출전한 국제 대회에서 덩치가 큰 유럽 청소년들에 밀려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낸 것이 스스로 분발하는 계기가 됐더군요. 그 후 그는 자신이 스포츠 클라이밍을 선택한 일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자라면 수치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손과 발에 대해서도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대가 정도로.

최근에 그가 부쩍 자주 언론에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소속사 덕인지 일전에는 김연아 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됐더군요.
그는 정작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가 이룬 성과가 그를 보통 사람이 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거죠. 게다가 올해 그는 클라이밍 분야에서는 영화의 오스카상에 비견되는 아르코락레전드 후보에도 올라 있습니다. 한 마디로 보통 사람들에게 생소한 스포츠 클라이밍 분야에서만큼은,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선수나 축구의 박지성선수가 된 거죠.

저는 그가 대중에 거론될 때마다 그의 손과 발이 떠올라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의지를 지녔던 그가 한낱 스포츠계의 신데렐라 정도로만 비쳐지는 것 같아서요.
대중이 그의 얼굴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았던 그의 손과 발을 먼저 봤으면 합니다. 저 자신도 그의 손과 발을 떠올리고 나면, 다시 생에 대한 각오를 다잡는 계기가 되곤 합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캐묻곤 하는 거죠.

가끔씩은 후배들에게도 그걸 묻고 싶어집니다.
누군가로부터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오래 간직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유명한 사람은 감동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속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유명세에 관심 없는 보통 사람들이 진짜 감동을 선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는 곧 감동이 퇴색해버리곤 합니다.
머지않아 그 무명인이 유명해지면 감동마저 상품이 되고 마니까요.
저는 스포츠 클라이머 김자인이 크게 유명해져도 그의 손과 발이 제게 줬던 감동만큼은 쉽사리 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손과 발이 준 감동 말입니다.